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자롱 황제 (문단 편집) === 시암의 지원 === 1784년 응우옌푹아인은 짜우반띠엡, 응우옌반타인(Nguyễn Văn Thành, 阮文誠, 완문성), 막뜨사인(Mạc Tử Sanh,鄚子泩, 막자생), 완문함을 이끌고 가정을 공격했다. [[라마 1세]]는 육곤과 사원을 보내 시암이 임명한 [[캄보디아]] 총독에게 응우옌푹아인을 지원하도록 했고 이후 라마 1세의 조카 소증과 2만의 병사, 배 300척을 방콕에서 출발시켜 가정을 공격했다. 시암군은 견강성의 적석시[* 堅江省 迪石市], 삭장성 삭장시[* 朔莊省 朔莊市.], 영륭시 차온현[* 永隆省 茶溫縣]에서 군세를 이어갔고 레반꾸안 등이 응우옌푹아인에게 호응했고 짜우반띠엡이 전사하자 레반꾸안을 그의 후임으로 임명했다. 서산군수직 장문다는 응우옌푹아인의 공세에 가정을 잃고 등문진을 보내 [[타이득|응우옌반냑]]에게 도움을 요청하기에 이르렀다. [[떠이선 왕조]]의 [[타이득|응우옌반냑]]은 동생 [[꽝쭝|응우옌반후에]]를 파견했고, 그들은 시암의 주요 진격지인 미추시에 복병을 두었다. 시암군은 가정 일대에서 약탈을 저지르고 금은보화와 노비들을 약탈하는 만행을 저질러 응우옌푹아인은 그들을 귀국시켰다. 그 결과 응우옌푹아인은 시암국 내에서 홀대받았지만 시암이 가정에서 멋대로 구는 모습에 실망했고 곧 패할 것이라 생각해 막뜨사인에게 미리 퇴로를 열라 하여 도망갈 준비까지 해놨다. 이후 서산군과 시암군 간 충돌이 있은 후, 응우옌반후에가 소증에게 예물을 건네 대월 내전에 간섭하지 말 것을 요구하자 소증은 요구를 받아들였는데, 시암은 서산을 경멸하게 되었으며, 한편으론 시암군이 뇌물을 받았다는 사실에 연합군이 서로를 의심하는 상황에 이르렀다. 결국 1785년 4월 응우옌반후에의 복병에 당한 소증은 시암군 2~3천명만을 이끌고 캄보디아 총독의 도움으로 시암으로 도망갔고, 응우옌푹아인 역시 대부분의 기반을 잃은 채 가족과 시암으로 도망간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